시간의 강물은 자꾸 흘러가고 있는데
신정일의 '길 위에서'
이리저리 걷다 보면 길은 항상 여러 곳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리 갈 수도 저리 갈 수도 있는 자유가 재산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리 가는 것도 저리 가는 것도 모두가 불안이 내재 되어 있는 현실 때문에 그 갈림길에서 서성이는 버릇, 그 버릇이 죽기 전까지도 이어진다는 사실이 가끔씩 나를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향해, 당신의 고립과 당신의 감정, 당신의 운명을 향해, ‘네’라고 말하십시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저도 모르고 당신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분명 삶 속으로, 현실 속으로, 시급하게 꼭 필요한 곳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 길을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 삶을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마음을 편하게 해줄 때도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편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헤세의 말처럼 내가 갈수 있는 길은 결국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쓸쓸한 행복이기도 하지만 불안한 불행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손짓하며 오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선택하고서 그 길이 희망의 길인지 절망의 길인지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길을 꾸역꾸역 걸어가는 나날이 도대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이렇게 혼돈 속을 항상 헤매는 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누군들 그 자신의 몸 즉, 건강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괜찮으려니 하고 지나다가 어느 날 문득 어딘가 로부터 전해오는 긴박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는 이미 갈 데까지 가버려 다시는 그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지점에서서,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름다웠던 지난날들을 회상 하게 되는 안타까운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없어지면 이 우주가 없어지는 것인데, 오지 않는 내일을 위하여, 또는 자식들이나 누군가를 위하여 쓰지도 못하고, 간직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그 물건들은 저 혼자 빛을 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잊혀짐을 아쉬워하며 혼자 한숨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시간의 강물은 자꾸 흘러가고 있는데.
/글·사진=신정일(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대표)